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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언성을 높이며 "내가 바로 응급환자다!"라고 호소하는 분들, 사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뜻일 때가 많지요.
정말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은 고통 때문에 한마디 말도 힘들고, 소리칠 기력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응급실 뺑뺑이 문제만 나오면, 사람들은 병원이 환자를 일부러 받지 않는 '악의적 행위'에만 화살을 돌립니다. 저 역시 병원 현장에서 일하는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 문제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상 수가 OECD 평균 세 배에 달하는 서울에서 왜 매일같이 응급실 대란이 벌어지는지,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서울시 응급 병상은 모두 1,200여 개로, 인구 대비 병상 수는 OECD 평균보다 세 배나 많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병상이 넘쳐나야 하지만, 현실은 매번 '병상 없음'입니다.
실제 응급실의 병상 현황판을 보면 대부분 마이너스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이너스 숫자는 응급 병상이 이미 가득 찬 상태에서 입원을 위해 대기하는 환자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당장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병원이 늘 줄을 잇고 있으며, 이러한 마비 상태는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병원이 환자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병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응급실의 귀한 병상들이 정작 중증 환자가 아닌 경증 환자들로 채워져 있어 공간 자체가 마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증 환자가 응급실을 찾는 일은 뉴스에서도 자주 볼 만큼 흔해졌습니다. 최근 한 TV 뉴스에 나온 사례처럼, 40대 남성이 단지 배가 아프다는 이유로 대학병원 외래 예약이 어려워지자 119를 불러 응급실에 내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경증 환자들이 응급실을 일반 외래처럼 이용하다 보니, 응급실은 중증 환자의 공간이 아니라 만성적인 대기 장소로 바뀌고 있습니다. 결국 진짜 위급한 환자가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경증 환자들이 응급실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 옆에서는 중증 환자들도 함께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응급실 입구에 구급차들이 길게 줄 서 있는 모습도 이젠 익숙합니다.
이렇게 구급차가 경증 환자를 태우고 한 시간, 두 시간씩 병원 앞에 대기하는 동안, 그 구급차는 더 이상 긴급 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결국 다른 곳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심정지 환자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응급실이 제 역할을 찾는 첫 단계는 원래의 기능, 즉 중증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자리를 되찾는 데 있습니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를 풀려면 단순히 병원만 탓하거나, 처벌로 겁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도 강조하듯, 인력과 병상 같은 인프라 부족도 분명 큰 요인이지만, 응급실을 이용하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응급실은 정말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만 찾는 곳이어야 합니다. 경증 환자가 119를 부르거나 응급실을 찾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진짜 위급한 환자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모두가 자각해야 합니다.
중증 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의료 시스템을 살리는 출발점입니다.
누구나 응급실의 본래 역할과 제한된 자원의 소중함을 이해할 때, 도로 위에서 생명을 잃는 비극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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